한국교회 선교 역사에 나타난 선교 협력/파트너십 / 손상웅 목사 SEED 선교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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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드선교회 작성일20-06-15 10:28 조회4,22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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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 역사에 나타난 선교 협력/파트너십
1884년 26세의 호레이스 N. 알렌이 한국 땅을 밟으면서 한국 선교의 길이 터졌고, 이듬해 26세의 호레이스 G. 언더우드와 27세의 헨리 G. 아펜젤러의 방한은 한국 선교의 시작을 알렸다. 그런데 이들의 한국 선교는 선교 한국을 지향하 면서 선교 한국의 전략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전개했다. 그중의 하나가 협력이었다
이제 선교 한국이 시도했던 협력의 몇몇 사례를 통해 그 기준 지표를 찾아보고자 한다.
36세의 조지 H. 존스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가 담임한 용동 감리교회 (현 감리교회) 는 1903년 1월 이후 하와이에 도착한 농업 이주민 한국인촌에 홍승하를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홍승하는 남양 속장으로 1년 동안 일곱 교회를 개척하여 ‘남양
구역의 바울’로 불린 전도자였다. 1904년 2월 14일에 하와이에 도착함으로써 40세의 그는 한국 감리교회의
제1 호 선교사이자 선교 한국의 제1호 선교사라는 영예를 얻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직후 그는 노동 이주민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홍승하가 보낸 안정수와 우병길은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의 조지 L. 피어슨 감리사와 협의하여 그해 11 월 3일에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본 선교회는 호놀룰루 교회로 불렸는데 지금의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모체가
된다.
1904년 말 현재 14개 처에 기도처를 개척하였고 총교인 수는 402명에 이르렀다. 이듬해에는 한인 교인 수가 605명이었는데, 이 숫자는 하와이 한인 총수의 1/3에 해당하였고 한국인 교인 수는 하와이 지역의 전체 감리교 교인 수 945명 중 64%를 차지했는데 반해 일본인 교인 수는 276명, 백인 교인 수는 64명에 그쳤다
1909년 한국장로교는 평양신학교 제2회로 졸업한 32세의 최관흘 목사를 러시아 선교사로 해삼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송했다. ‘고국 강산을 이별하고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운 나그네로 불쌍히 죽어가는 50만 명이 있는 이곳에 선교사 한 사람을 급히 보내주기를 청원’ 함에 따랐다. 길선주 목사의 주창으로 목사가 된 지 두 달도 안 된 최관흘은 교회 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교 여정을 출발했다. 먼저 러시아 당국에 장로교 목사로서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 음을 알리고 장로교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 답은 미온적이었으나 그는 1년 만에 세운 해삼위 삼일교회에는 출석 교인 648명 중에 세례 교인 38명과 학습 교인 68명이 있었다. 여기서 800Km 이상 떨어진 하바롭스크와 하얼빈까지 다니면서 그는 400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인 선교 효과에 러시아 정교회가 주목했고, 이듬해 러시아 정교회는 협력은 고사하고 러시아 정부를 앞 세워 최관흘과 개신교 선교를 압제했다. 1911년에는 해삼 위 거주 한인들은 인근 신한촌으로 강제로 이주당하였고 삼일 교회가 전소되는 참사에 직면했다.
그런데도 1911년 총회 보고에 따르면 예배당이 두 예배처소가 13곳, 교인이 764명, 연보가 902원 29전으로 부흥하였다. 이런 가운데 재정 부족과 선교 환경 악화 등으로 최관흘은 해삼위를 손정도의 감리교 구역으로 넘기자는
청원을 하였다. 때마침 러시아 정교회 산하에서 선교할 것을 불응한 그 가 1912년 옥고를 치른 후 ‘선교 협력’을 목적하고 러시아 정교회 교인에 이어 1914년에는 ‘교리 문답사’가 되어 지방 순회 전도와 세례자 교육을 강화하여 한인 전도에 힘썼다. 그는 모든 한인 선교사가 소환되어 연해주 선교가 중단되던 1926년까지 8년간 한인 선교를 지속하였다. 그의 개종을 문제 삼아 함경노회는 1916년 그를 제명하였으나 러시아 정교회의 극심한 핍박 때문에 불가피했음을 들어 함북노회는 1922년 그를 복직했다.
산동 선교는 1912년의 황해 노회에 소속된 43세 윌리엄 B 헌트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에서 시작된다. 그의 주장으로 본 노회는 그해 9월에 열리는 장로교 창립총회에 중국 선교 안건을 청원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도국의 주요 인물이었던 43세의 길선주 목사는 중국 선교에 남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해 한국 장로교는 총회를 조직하면서 중국 선교를 결의하였다.
그해 총회 전도국 위원이었던 헌트는 중국 산동을 방문하여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와 중국 교회와 협의하였고, 이 듬해에는 박태로가 김찬성과 함께 산동을 방문하고 선교지역을 협의했다. 1913년에 42세의 박태로, 35세의 김영훈 그리고 34세의 사병순 등 세 목사를 파송한 한국 장로교 총회는 전국 교회의 추수감사헌금으로 산동 선교를 지원했다.
그들이 담당한 선교 구역은 내양이었다. 이러한 지역 배분은 당시 산동성에서 사역하던 미국 북장로교와 미국 침례교회와 영국
침례회와 스웨덴 침례회 그리고 중국 공리회(감 리회)의 협력으로 가능했다. 특별히 이들 세 선교사가 중심으로 설립된 내 양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산하 지역
일부를 이양받아 발전시킨 결과였다.
1916년 중국 현지 산동독노회는 이유렴과 동문진의 명의로 한국 선교사를 이명 하라는 편지를 한국 예수교 장로회 총회 전도사무국 이일영 목사에게 보냈다. 산동의 한국 선교사들이 중국 산동독노회 지역 안에서 사역하려면 이명 증서가 있어야 노회에도 참여하고 사역하기에 편리하다는 이유였다.
한국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위의 세 선교사의 산동독노회 이명을
허락하되 산동에 있을 때는 그 노회 회원이 되고 귀국할 때는 본 총회 회원이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1917년의 내양교회는 53명으로 성장했다.
산동선교는 45년간 계속되었지만 1916년에 박 태로는 질병으로 나머지 2명은 이듬해에 무단 자퇴하는 상태에서 협력의 어두운 부분을 들어냈다.
46세의 임종순 목사는 정인과 목사와 더불어 한국 장로교회 대표로 파송받아 1921년 9월 16일부터 25일까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개최한 만국장로교 연합 총회에 참석했다. 참석 후 임종순은 뉴욕에 교회가 없음을 알고 유학생과 한인 교포 등 100여 명의 한인을 찾아다니며 복음의 메신저가 되었다. 이듬해 3월 1일 뉴욕 타운홀에서 삼일절 기념 식을 가진 직후 콤몬도어 호텔에서 평가회를 가졌을 때 엔지 그레이함 킴벌랜드 여사가 뉴욕 한인교회의 창립을 제안 하면서 동석한 랄프 W. 삭크만 목사가 섬기는 뉴욕의 매디슨 애비뉴 감리교 예배당에서 임종순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미 한인들이 예배를 시작했지만, 미국 감리교가 한국 장로교 목사인 임종순을 한인 예배처소에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한인 예배처소가 미국 감리교에 소속이 되었다. 본 교회는 뉴욕 한인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선교 한국을 통해 경험한 협력은 대단했다. 이 협력의 기준 지표는 교회가 복음을 선교함에서 눈에 보이게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협력이 교회의 증거를 더욱 힘있게 만들었음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협력이 반드시 전도를 진척시키지 않는다는 주장에 협력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일치단결 해야만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현장 선교사는 잊지 않았다.
다른 한편 사악한 개인주의와 불필요한 중복으로 기독교의 복음 증거가 훼손됨을 방지해야만 한다는 교훈도 받았다. 선교 한국은 이제 좀 더 일치를 추구하기 위해 전략적 계획과 그리고 자원과 경험의 나눔으로 협력의 기능을 개발해야 하는 숙제 앞에 놓여 있었다. 오늘날의 선교 한국도 이러한 숙제를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